왕상 17:3 너는 여기서 떠나 동으로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고
왕상 17:4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을 명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왕상 17:5 저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머물매
왕상 17:6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저가 시내를 마셨더니

까마귀가 물어다 준 음식 (17장)
성경에서 가장 충격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인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역사 이야기의 흐름을 끊으며 등장합니다. 엘리야는 갑자기 아합에게 나타나서 이스라엘의 죄악으로 인해서 여호와께서 가뭄을 보내실 것이라는 경고를 하게 됩니다(17:17). 그 후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요단 강 앞 그릿 시냇가에 숨어 지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곳에서 엘리야는 그 시냇물을 마시며 까마귀들이 아침과 저녁으로 날라다 주는 빵과 고기를 먹으며 지내게 됩니다.

왜 하필 시냇물을 마시며 까마귀를 통해서 음식을 먹게 하였을까요? 까마귀를 통해서 공급 받은 음식을 먹으면서 엘이야는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요? 까마귀가 물어다 준 빵은 어떤 빵이었고, 까마귀가 물어다 준 고기는 고급스러운(한우 갈비) 것 이었을까요?.......글쎄요 저는 그렇게 고급스러운 것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만… 생각만 해도 조금은 먹기에 불편하지 않았을까요?

그렇지만 이 본문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봅니다.
엘리야의 마음과 하나님의 신실함 입니다. 이 본문에서 보여주는 엘리야의 마음은 적어도 하얀 백지처럼 보여 집니다. 하얀 백지 위에는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릴 수 있는 것처럼, 엘리야의 순수한 마음에는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명령을 내리실 수 있습니다. 조금은 비상식적인 명령이 내려진다 할지라도, 엘리야는, 마치 스폰지가 물길을 고스란히 빨아들이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 결과 그릿 시내가로 가서 지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엘리야에게 약속대로 신실함을 보여 주었습니다. 까마귀들이 아침과 저녁으로 빵과 고기를 날라다 주었습니다.

까마귀가 물어다 준 빵을 드셔 본적이 있는지요?
까마귀가 물어다 준 고기를 드셔 본적이 있는지요?
그릿 시냇가의 맑은 물로 목을 축이면서 말입니다.

물론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수고를 통해서 빵과 고기를 먹게 합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축복이요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길지는 않겠지만 까마귀가 물어다 준 음식을 통해서 살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큰 은총을 경험할 수 있는 시간일 것 입니다. 도저히 아무것도 없는데, 어디선가 하나님이 보내신 까마귀들이 우리의 필요들을 가지고 찾아 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까마귀들 입니다. 우리 인생은 이렇게 까마귀가 물어다 준 빵과 고기를 먹을 때 더욱 그분을 가까이 경험하게 됩니다. 이 때에는 그분의 신실함에 대한 인식이 아침마다 저녁마다 새롭게 새겨집니다. 겸손한 무릎으로 그분을 기억하며 더 깊은 감사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가난한 과부집의 기적 (왕상17)
왕상 17:9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
왕상 17:10 저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 그곳에서 나무가지를 줍는지라 이에 불러 가로되 청컨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나로 마시게 하라

이스라엘 땅에 비가 내리지 않자 시냇물이 말랐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시돈의 사르밧으로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거기에서 아들과 함께 먹을 것이 없어서 곧 죽을 처지에 놓여 있던 한 가난한 과부를 만나게 됩니다. 이 가난한 과부는 통에 남아 있는 밀가루 한 줌 그리고 병에는 기름이 조금 남아 있었고, 자신과 자신의 아들을 위해 마지막 음식을 만들고 죽을 생각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가난한 과부는 먼저는 엘리야를 위해서 조그만 빵 한 개를 구워주었고, 그 후 자신과 아들도 여러 날을 먹게 되었습니다. 그 땅에 가뭄이 지속 되어도 통 안의 밀가루도 떨어지지 않았고, 병 안의 기름도 마르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집에 하나님의 채우심의 기적이 일어나고 있는 것 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야기는 더욱 깊은 곳으로 흘러 갑니다. 엘리야는 질병으로 숨을 거둔 과부의 아들을 살려내는 것이었습니다. 이 기적을 보고 가난한 과부는 엘리야를 하나님께로부터 파송을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하나님의 사람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런데 곰곰이 본문을 읽으며 생각해 봅니다.
왜 하나님은 하필 이토록 가난한 과부에게 엘리야를 보냈을까요?
왜 하나님은 하필 이토록 가난한 과부에게 매일의 양식의 축복과 기적을 베풀어 주셨을까요? 이 여인은 이방 여인인데 말입니다.

비록 그녀는 세상에서는 의지할 곳 없는 연약한 과부였고, 유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신분이 비천한 이방인이자, 여성이었습니다. 물질적으로도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과부는 이러한 외형적인 가난한 뿐 만 아니라, 내면적으로도 가난한 사람이었던 같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집으로 불쑥 나타난 엘리야, 그리고 그 무자비한 요구 (‘먼저 나를 위해 조그만 빵 한 개를 구워 주시오. 그러고 나서 당신과 당신 아들을 위해 먹을 것을 만드시오’ 17:13) 마져도 그대로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과부는 가서 엘리야가 말한 대로 했습니다’ 17:15).

무엇보다도 이 가난한 여인의 고백(‘이제 당신이 하나님의 사람인 것과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임을 알겠습니다’: 17:24)은 엘리야의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과는 뚜렷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3년 동안 가뭄을 경험하면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이 여인은 가난한 마음을 소유하게 되었을까요?
어쩌면 그녀의 이러한 가난한 배경이 그녀의 심령을 이처럼 가난하게 만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누가 복음에서는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하고, 마태 복음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구약에서는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같은 의미로 사용할 때도 종종 있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바벨론 포로 시절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질적으로도 가난했고, 뿐만 아니라, 그 심령도 가난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루 하루 먹고 사는 것이 힘들었고, 아울러 그들의 심령은 하나님 한 분 만을 찾으며 그분의 도우시는 손길을 간절히 사모하면서 그 분만을 의존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과부의 가난한 환경이 마음 조차도 가난하게 만들었을 것 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들이 이 사르밧 과부에 대해서 환경적으로 불쌍한 가난한 사람으로 보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과부의 가난한 마음, 가난한 심령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부의 가난한 심령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사랑하는 선지자 엘리야를 돌보게 하셨고, 이 일을 통해서 자신의 일들을 성취시켜 나가게 되었습니다.

주님을 먼저 생각하는 가난한 심령이 있는 자 하나님은 먼저 그들을 기억하실 것 입니다. 주님을 뜻을 가감 없이 받드는 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해서 그분의 일을 수행하실 것 입니다. 
2014/12/01 12:59 2014/12/01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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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있는 사람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시편 1:1)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1절은 부정적인 것을 언급하고 그 다음 2절은 긍정적인 것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전자에 있어서는 좀더 적극적인 행동을 포기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좇지 아니하며, 서지 아니하며, 앉지 아니하며’ 즉 아예 우리의 삶이 얼씬거리지도 말아야 할 것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곳은 곧 하나님이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없기에 온갖 어두운 죄들과 교만함이 자리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후자는 적극적인 행동 보다는 정적인 자세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기쁨과 묵상이라는 깊은 헌신된 삶을 사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삶은 정적이라 크게 드러나지 않지만 더욱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 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지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말씀으로 채워진 사람이 이 땅에서 결코 실패하는 삶을 사는 경우는 없을 것 입니다. 그러하기에 그에 삶은 복된 삶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많은 것을 보고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눈에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그 풍성한 것 보다는 세상에 사람들이 이미 지어낸 많은 것들을 보면서 그것들에 더 값어치를 두면서 사는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복에 대한 개념도 가치도 기준도 뒤틀려 살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 식의 복을 받기 위해서는 때로는 악인의 꾀를 좇아야 하고 죄인의 길에 서기도 해야 하며 오만한 자리에도 앉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것이 당연한 삶으로 받아들이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즉 잘못된 수단을 통해서 얻게 되는 나 만의 부요한 삶에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았다고 색칠을 하며 기뻐하고 만족해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간증 속에서 이런 고백을 쉽게 듣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축복해 주셨지요. 사업과 직장도, 집도, 학교와 학위도, 자녀도 모든 것이 잘 되었지요…’ 라는 말들을 들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참으로 감사한 일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진실로 복을 받았다면 우리 자신에게 물어 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기뻐하고 있는가? 주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있는가? 주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연구하며 삶에 부지런히 적용하며 살고 있는가? 오늘 하루도 그 분의 말씀에 우리 자신을 깊이 담그며 우리의 삶이 말씀이라는 곳으로 그 무게 중심이 완전히 이동되어서 살고 있는가? 복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일수록 시편의 이 말씀을 자기 자신에게 냉철하게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2. 시편 묵상: 복 있는 사람. (시편 1:1-2)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시편 1:1-2)

잠언과 시편의 책에서는 기쁨 넘치는 삶, 복된 삶에 대해서 여러 번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책들을 소위 지혜 문서(Wisdom literature) 라고 말 합니다. 이러한 축복된 삶은 항상 사람들과 연관이 되어져 있어서 복된 삶이야 말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여기 히브리어 ‘asre’라고 하는 단어는 어떤 번역서에는 ‘행복(happy)’으로 또 다른 번역은 ‘복 있는 (Oh the blessedness of)’ 것 으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여기 ‘복 있는 사람’이 ‘상급을 받는 의미로서 그의 삶이 기쁨이 넘치는 감탄의 삶’ 또는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것’으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즉 이 단어는 우리 모두가 부러워하고 지향하려는 인간의 복된 삶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 입니다.

먼저 시인은 이러한 복된 살을 위해서 부정적인 의미에서 피해야 될 세가지 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not walk in the counsel of the wicked),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는  ‘악인과의 사귐(fellowship)가운데 걷지 아니하며’ 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여기 세가지로 표현된 동사들 즉 ‘좇지 (walk)’, ‘서지 (stand)’, 그리고 ‘앉지 (sit)’ 라는 표현들 속에서 사람들의 모습이 점점 더 심하게 죄 가운데로 빠져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 사람들은 단지 나쁜 사람들과 별 의미 없이 사귀게 됩니다. 즉 사귐을 통해서 그들이 가는 곳을 아무 생각 없이 가게 (walk) 됩니다. 그런 후에 죄인들이 있는 그곳에 멈추어 서게 되고(stand) 마침내는 점점 그들과 함께 동화되어서 그곳에 주저 앉게 (sit) 되는 것 입니다.

이런 교훈의 말이 있습니다. 생각은 행동은 낳고 행동은 습관을 낳으며 습관은 인생을 낳는다. 대학교 때 ‘어둠의 자식’들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폭력배 ‘동철’ 이와 창녀 ‘화숙’ 이를 통해서 기구하게 펼쳐지는 인생을 그린 책인데 저는 그 책을 읽으면서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 땅의 죄악들이 넘치는 곳에서 희생양이 되어 어두운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으로 눈물을 흘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번 어두움에 갖힌 인생이 그곳을 빠져 나오기가 너무도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미 그 자리에 주저 앉았기(sit) 때문이기도 합니다. 악한 생각들이 이미 행동으로 옮겨져서 습관이 되었고 마침내는 악을 되풀이 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새가 머리 위에 나는 것은 어떻게 할 수 없지만 그 새가 자신의 머리 위에 둥지를 터는 것은 막아야 한다는 말이 있지요.

두 번째 절은 좀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복된 삶으로 우리를 인도 합니다. 여기 여호와의 말씀 즉 토라(Torah)는 우리의 삶을 인도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교훈 (instruction) 입니다. 이 토라는 우리가 기쁨을 누리는 데 근원이(source) 되며 이 기쁨은 이 토라의 의미를 지속적으로 묵상하는 가운데 경험할 수 있습니다. 신명기 에서는 (신 17:18-20) 이 토라를 깊이 자신의 삶 가운데 반추하는 것을 통해서 비로서 왕은 겸손하고도 의로운 삶을 배울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잠언에서는 (잠 3:1-2) 이 토라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해서 평강과 축복의 삶 그리고 이 땅에서 오래 살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 ‘묵상하는 (meditation)’ 이라는 단어를 눈 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 히브리어 동사 h-g-h는 성경에서 마치 젊은 사자가 그의 밥을 보고서 어르렁 거릴 때 사용되었고(사 31:4), 비둘기가 끊임없이 울 때에도 사용되었으며 (사 38:14), ‘말하다’ (시 37:30, 71:24) 또는 ‘기억하다’ 그리고 ‘깊이 명상할 때도’ (143:5)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쿰란 문서에서는 ‘the book of hgw’ 라는 문구를 발견할 수 있는데 이것은 대개 ‘암송하는 책 (the book of recitation)’으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Graige 라는 학자는 이 ‘묵상하는’ 이라는 단어를 ‘중얼거리다 (murmuring)’ 또는 ‘소근 소근 속삭이다 (whispering)’라고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여기 묵상 하다는 의미는 말씀이 우리의 입술에서 떠나가지 아니하고 항상 담겨져 있어서 그 말씀을 말하고 암기하고 되 새겨야 하는 것임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여기 ‘묵상하는’ 이라는 동사가 단지 우리의 입술에만 반복되어져서 지적인 깨달음 가운데 만족하는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즉 말씀을 묵상한다는 의미는 말씀을 실행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깊이 연구하는 의미로 사용 되어졌다는 것 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여호수아 1:8절을 통해서 확인이 됩니다: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거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여기에서 묵상과 행함은 함께 공존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묵상을 넘어서 주님의 말씀을 행할 때 그 사람의 실체를 볼 수가 있습니다. 즉 행함까지 도달해야 비로서 참된 열매를 맺는 것 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묵상의 삶 실천의 삶은 주야로(day and night) 지속적이 되어야 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지속적일 때 힘이 생깁니다. 작은 물 방울이 지속적일 때 바위를 뚫을 수 있듯이 말 입니다.

현대 서구 성서 신학의 최대의 강점은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려는 이성적인 노력에 있습니다. 이들의 진지하고도 성실한 학문의 자세에 감복을 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서구 교회들이 맥을 못추는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들 중에 하나는 그 말씀을 삶 가운데 적용하는데 매우 약하다는데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해석에 놓은 말씀에 대해 너무 관심이 많은 나머지 그 말씀이 당신 자신의 삶과 어떠한 관련을 맺고 있는지 진지하게 고민할 틈이 없는 것 입니다. 성경이 기록된 1세기의 정황에 대해서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들이지만 오늘 그 말씀이 자신에게, 교회에게 그리고 이 세상 사람들에게 무엇을 말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말씀이 요구하는 주님을 위한 헌신과 희생의 삶을 서구 신학과 교회에서는 발견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이것이 신학과 말씀 그리고 서구 유럽의 신학교와 교회가 분리될 수 밖에 없는 중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잘 해석된 말씀이라도 그 말씀이 우리가 사는 상황 즉 개인의 삶과 교회에서의 신앙 생활 그리고 사회적 활동 가운데 깊이 있게 적용되지 아니하면 외식하는 사람(마태 23: you hypocrites!)으로 낙인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삶이 없는 성도와 교회는 이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될 더 이상의 힘과 능력이 없는 것 입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 시편을 쓴 다윗에게는 모세오경을 제외하고는 성경의 많은 부분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하나님 말씀 중에서 작은 부분 만을 가지고도 그에 삶은 복된 삶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다윗과 비교해서 우리는 모세 오경 뿐만 아니라 신약을 포함해서 성경의 66권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집으로 말하자면 다윗은 방 한칸 즈음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화장실 과 부엌 그리고 거실과 방 몇 개를 가진 완성된 집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주어지 큰 집 그리고 그 속에 채워져 있는 모든 시설들을 우리가 스스로 감사하며 기쁜 마음으로 누리며 살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얼마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기뻐하며 감격해 하며 그것을 가지고 주야로 묵상 하고 연구하며 더 나아가 말씀 가운데 우리의 삶을 살고 있는지 스스로 자문자답 해야 할 것 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성경을 몇권 이나 연구하고 묵상했으며 또 그 말씀대로 실천하며 살고 있는지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복된 삶을 사는데 척도가 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시편1;3)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이 있는 곳에 걷지도(walk), 서지도(stand) 그리고 앉지도(sit) 않으며 오직 주님의 말씀을 항상 마음 가운데 담으며 그것을 암송하고 되새기며 그 말씀대로 사는 사람임을 1,2절에서 말했습니다. 3절은 이러한 사람이 시냇가에 심은 나무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여기 나무는 그냥 나무가 아닙니다. 시냇가에 뿌리를 내린 나무인 것입니다. 즉 그 나무는 광야나 들녁에 아무렇게나 자라난 나무가 아니라 시냇가에 잘 심겨진 (planted), 잘 선택이 된 (chosen; 벧전2) 그리고 잘 성장하고 안전하게 자라나서 재산적 가치가 있도록 하는 귀한 나무 입니다.  

나무를 자세히 관찰해 보면 뿌리가 얼마나 귀한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뿌리에는 뿌리털이 있어서 이 뿌리털이 뿌리의 겉넓이를 넓히고 수분이나 무기양분을 흡수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몸의 세포와 같은 피층이 있어서 뿌리털 에서 흡수된 수분 등이 내부의 관다발조직으로 이동할 때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뿌리가 보통 식물체의 땅 아랫부분에 있으며, 땅 윗부분을 지지하고 땅속의 수분이나 무기염류를 흡수하여 땅 윗부분으로 보내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무는 뿌리에 의해서 좌지 우지가 됩니다. 나무는 그 뿌리를 통해서만 존재하며 뿌리가 어떠한가에 따라서 그 나무의 됨됨이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뿌리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질문입니다. 뿌리가 시냇가에 있다 함은 나무로서 가져야 할 가장 최상의 입지조건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스코틀랜드의 씨튼 파크를 (the seaton park) 걷다 보면 나무들이 곧장 줄 곧게 하늘을 향해서 뻗어 있고 푸른 잎사귀가 무성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 공원을 끼고 큰 시내가 흐르고 있어서 나무들에게 충분한 수분을 공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단 이 공원만이 아니라 대체로 스코틀랜드에는 큰 나무들이 줄 곧게 뻗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년 내내 비가 촉촉히 오고 있기 때문에 그 나무들이 필요한 수분을 충분히 섭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뿌리를 내렸다 함은 이 세상에서 열매를 맺는데 푸른 잎사귀를 내는데 가장 최상의 입지조건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용서와 은혜의 시냇가 (the rivers of pardon and the rivers of grace)’ ‘주님과 깊이 있게 교제하는 말씀의 시냇가 (the rivers of communion with Christ)’에 뿌리를 내린다면 우리의 삶은 매일 매일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될 것 입니다. 고통가운데 인내함의 열매를, 시험가운데 굳센 믿음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형통하게 되어 질 때에도 겸손하여서 거룩한 기쁨(holy joy)을 누리는 사람이 될 것 입니다.  말씀에 뿌리를 내리는 삶이란 바로 이러한 열매들을 맺는 삶인 것 입니다. 그것은 아랫부분이 튼튼하기 때문에 윗부분도 아주 건강한 생명력이 넘치는 삶 입니다. 그 뿌리가 절대적인 주님의 말씀들을 매일 매순간 흡수하기에 그에 삶은 이 땅을 넘어서 하늘로 무한히 자라나는 소망 있는 삶인 것 입니다. 그러하기에 그가 하는 모든 일들은 의미를 가집니다. 그가 하는 모든 일들 속에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whatever he does prospers)’ 라는 말씀을 숙고해 보아야겠습니다. 혹자는 이러한 형통함이 마치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측면에서만 이해하여서 우리 스스로가 이 땅 가운데서 아주 높아지고 상향적인 삶을 누리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입니다. 사실 이러한 부요 고도 높은 삶도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가난해야만 하고 낮은 자리에서만 있으라는 법은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열심히 노력했다면 그만한 대가를 받는 것이 이치일 것 입니다.

그러나 여기의 형통함은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참된 형통함은 우리의 영혼이 주님 앞에 더욱 애통해하며 (mourn) 가난해져서 (poor) 주님처럼 닮아가는 것에 대한 것에 대한 형통함인 것 입니다. (We often, like Jehoshaphat, make ships go to Tarshish for gold, but they are broken at Ezion-geber). 왜냐하면 우리가 하는 모든 일 속에서 우리의 삶의 목표가 그분 예수 그리스도 이시기 때문입니다. 즉 말씀에 뿌리를 내리며 살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닮게 되며 그리고 주님을 닮고자 하는 우리의 간절한 소망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 이루어 지게 됨을 즉 형통하게 됨을 목도 할 수 있는 것 입니다. 이것이 여기서 말하는 형통함의 본질인 것 입니다. 따라서 이 땅에서의 높은 위치 낮은 위치 가난과 부 이 모든 것은 이러한 형통함의 본질적이 관점에서 보면 이차적인 것에 불과 합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에게 있어서 어려운 상황들은 종종 가장 좋은 것일 수 도 있습니다. (Our worst things are often our best things). 왜냐하면 그 어려움과 고통을 통해서 우리는 자라나며 그리고 풍성한 열매들을 맺는 신앙인이 될 수 있기 때문 입니다. 이러한 어려움과 고통은 경제적 사회적인 관점에서 보면 실패한 것으로 비칠 수 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주님의 십자가 지심 그리고 그 고통과 슬픔은 경제적 사회적 가치 기준에서는 아주 보잘 것 없는 죄인의 죽음으로 낙인 될 수도 있지만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들을 위한 가장 큰 축복의 도구가 되셨다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높은 위치에 있어야 하고 부해져야 하며 하는 식의 낮은 목표로 그것을 최상의 기쁨으로 인식하며 살기보다는 좀더 숭고하고 더욱 거룩한 목표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주님을 닮고자 하는 거룩한 목표 앞에서 매일 매일 자신의 삶이 형통하게 됨을 경험하는 것을 더욱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이 지혜 있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말씀에 비추어서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 봅시다. ‘나’라는 나무는 지금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는가?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고 시절을 좇아 풍성한 열매들을 맺고 있는가? 나의 삶 속에서 형통함을 매일 매일 경험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형통함의 본질이 그분을 깊이 닮아가는데 있는가 아니면 사회적 경제적 차원에서의 형통함을 추구하고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갔던 인물의 예화를 하나 넣으면 좋을 것 같다)
2014/11/25 08:21 2014/11/25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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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세차: 나의 삶을 정결하게 씻어 주옵소서. (2006년 여름)
가끔씩 세차를 합니다. 세차를 한다는 것은 제 차의 겉이 온갖 먼지로 얼룩져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세차를 하면서 몇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세차를 하려면 먼저 차의 기아를 중립으로 놓아야 합니다. 기아를 중립으로 놓았다는 것은 이미 자동적으로 세차해주는 그 선로 위에서 자동세차 기계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물을 뿌리고 걸레질을 하고 그러면서 앞으로 전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한번은 제 차의 바퀴가 자동세차 기계의 선로에 따라 움직이지 못하고 밖으로 튀어 나오려고 해서 당황했던 적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 차의 기아를 중립으로 놓지 않고 정지에다 놓았기 때문입니다. 즉 정지에다 놓은 기아가 내 차를 꽉 붙잡고 있었기에 자동세차의 기계가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 입니다. 그래서 바퀴가 선로 밖으로 튀어 나오려 하고 핸들이 갑자기 돌아가면서 전체 자체가 흔들리기 시작 했던 것 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나의 인생을 내가 꼭 쥐고 있는 것 과도 같았습니다. 내가 내 인생을 꽉 쥐고 있을 때 주님은 우리를 바르게 인도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바른 인도가 없는 곳에서는 나의 삶의 깨끗함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내 것을 내려 놓고, 내 힘을 뺄 때 즉 내 생각 내 고집 내 편견 내 뜻 내 힘을 내려 놓을 때 우리는 비로서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날 마다 깨끗게 되는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더러워진 내 마음 혼잡한 내 생각에 물을 뿌리고 걸레질을 비로서 할 수 있는 것 입니다.

자동 세차 기계 안에서 차가 세차를 당하는 시간은 흡사 혼돈의 시간과도 같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온갖 물들과 걸레질 그리고 소음으로 혼란스럽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이 조금 지나면 마지막으로 깨끗한 물들이 뿌려지고 강력한 바람이 차의 앞에서부터 뒤까지 모든 물들을 날려 버리면서 비로서 차는 깨끗해지고 평온의 세상으로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씻는 시간도 그러합니다. 눈물이 있고,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더럽습니다. 언제 깨끗한 삶을 온전히 살게 될 지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그러나 나의 기도 가운데 통곡이 있을 때 주님은 우리를 보혈의 피로 머리에서 발끝까지 뿌려 줍니다. 정결해집니다. 깨끗해 집니다. 그리고 성령의 강한 바람이 나의 온 삶을 덮어 줍니다.

세차를 하고 나온 제 차가 유리창 너머로 찬양이 울려 퍼지면 비로서 새로운 세계가 열립니다. 우리의 삶은 매일 세차를 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매일 깨끗하게 씻겨져서 하나님의 영이 가득 차야 합니다. 보혈의 피 성령의 바람이 우리의 삶을 덮어야 합니다. 그 때 이 세상은 우리에게 새롭게 다가옵니다. 
2014/11/24 11:41 2014/11/24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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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1: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 50:26 요셉이 일백 십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1. 창1장과 창50장: 인간의 창조와 인간의 죽음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1:26-27)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이 단어 속에는 ‘특별함’이 존재합니다. 하나님만이 가지신 ‘인격’(칼빈), 이성 (reason), 창조성 (creativity), 말할 수 있는 능력 (speech), 영적인 본성 (spiritual nature)…등등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에는 두 가지의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인간이 지구상에 모든 창조물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대표자로서, 즉 하나님의 청지기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둘째는 인간이 하나님의 파터너 (counterpart)가 되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대화를 할 수 있는 관계로 묘사하고 있다. 여기에는 인격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와 하나님과의 인격적이고도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우리는 그분의 뜻을 이 땅 가운데 실현할 수 있는 특별한 존재로 지어졌음을 의미합니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특별한 기대와 은총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만큼 존귀한 자로 지어졌음을 의미합니다. 너무도 많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것들이 보석처럼 알알이 우리의 존재에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토록 귀하게 인격적으로 지어진 인간이 동시에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은 아이러니합니다. 창세기 1장은 창조의 대서사시가 우렁차게 울려나고, 그 중심부에는 존귀한 인간이 자리잡고 있지만, 창세기 50장에는 초라한 요셉의 죽음으로 창세기가 끝나고 있습니다. 결국 인간의 출생은 죽음으로 향하는 시작인 것입니다. 죽음이 주는 허무함과 초라함을 그 어떤 인간도 피할 수 없지요.

이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깨어진 인간의 종말이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라고 생각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창조 주 하나님은 우리에게 친구가 되어서 우리와 인격적인 대화를 나누며 교제하기를 원했지만, 우리의 교만은 그분을 끝내 거부해 버렸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이 세상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며, 우리 스스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교만한 자리에 서 있습니다.
내가 주인이 되어서 아내를 판단하고
내가 주인이 되어서 자녀를 판단하고
내가 주인이 되어서 사람들을 판단하고
내가 주인이 되어서 교회를 판단하고, 심지어 하나님도 판단을 하게 되지요.
내 자신이 왕입니다. 내 자신이 자율적인 인간이 되어서 주인행세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다 죽음 앞에서 자신의 무익함을 깨닫게 된다. 죽음 속에서 자신이 얼마나 자신만을 의지했는지 깨닫게 되지요. 그토록 의지했던 인간이 죽었을 때 그래서 사람들은 통곡하며 우는 것 같습니다. 사 2:22 "너희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아라. 그의 숨이 코에 달려 있으니, 수의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 인간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겸손하게 받아들일 때 우리는 창조 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때에만 결국 존귀한 자로 세움을 받을 수 있지요.
2014/11/24 11:34 2014/11/24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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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바라보는 이상인 목사(주님의 새교회)

20대 젊은 대학생들을 향해서 복음과 함께 희망을 노래했던 사람
30대 스코틀랜드 광야에서 10여년 동안 말씀을 붙잡고 살았던 사람
40대 신학교 교수와 온누리 교회 그리고 십자가의 길을 걸었던 사람
50대 New leadership, New Church, New Generation에 헌신하고 있는 사람
2014/11/22 15:56 2014/11/22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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