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토요일 서둘러 아이들 데리고 서울 대방동 여성 플라자를 향한다. 아이들 둘의 손을 꼭잡고 버스타고 전철타고 걸어서 느릿느릿 도착한 곳에서 세미나 참석하고 나서 문화공연에 참석해 시종 일관 주욱 자리를 잡고 있다가 발견한 아래 재미있고 의식있는 가수 중의 한사람을 발견해 신선한 하루를 보낸다. 청바지 차림에 걸죽한 음색으로 들리는 거친 목소리와 입으로 음색을 말하는 전자기타리스트외 1명 및 마무리를 아주 멋지게 하는 드러머 이렇게 4명이서 같이 나왔다. 말 잘 듣는 인간형에 길들여지고 그것에 익숙해져서인지 웬지 이 노동가 분위기는 처음엔 어색함으로 다가왔지만 이내 체질에 맞는 노래임을 알게 된다.
한국사회포럼2006 공식 홈페이지 - http://www.socialforum.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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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 피로 개척한 새로운 노동가요

문 화예술생산자연합 해산 이후 <라면>이라는 곡을 쓰며 음악활동을 시작했던 가수 연영석이 내놓은 첫 번째 앨범이다. 칼국수, 라면, 부품, 돌, 돼지등 예전의 민중가요와는 다른 소재를 가지고 자신의 삶을 고백한 이 앨범은 연영석의 자전적 성격이 가장 강한 앨범이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하게 포착하지는 못하였지만 직설적이면서도 풍자적인 노랫말이 신선하다. <나는 부품>같은 곡에서 연영석과 고명원이 만들어낼 2집 사운드의 가능성을 짐작하게 된다.

90 년대 중반 꽃다지의 앨범 이후 가장 완성도 높은 노동가요 음반이라고 할 수 있다. 반복되고 밀려오고 넘쳐나다 죽어가는 신자유주의 사회 민중의 삶을 통렬하게 고발하며 결코 시키는대로 다하다가 당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한 연영석의 목소리는 참으로 간절하고 생생하다. IMF 이후 민중의 삶을 사실적으로 증언하면서도 당대 대중음악의 질감과 겨루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 세련된 사운드를 뽑아낸 것이 놀랍기만 하다. 고명원은 다양한 이펙트와 기타 연주를 효과적으로 사용해 연영석의 곡들이 가진 차이를 선명하게 부각해냈고 이를 통해 자신이 프로듀싱한 앨범중 최고의 앨범을 만들어 냈다. 1집에 배어있는 게으름의 욕망이 보다 진전된 형태로 드러나 있는 것도 주목할만하다.

1, 2집에 이어 계속 고명원과 함께 작업한 앨범이다. 2집보다는 다소 정제되어 있고 때론 고단한 자신의 모습도 그대로 드러나있다. <코리안 드림>은 한국에서 차별당하는 외국인 노동자의 아픔을 분노에 찬 목소리로 담았고 <마지막 카드>에서는 신용카드 문제를 다뤘다. 언제나, 현재의 노동과 자본의 문제를 고민하는 노동가수로서의 연영석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떼레비>는 연영석과 고명원이 함께 빚어낸 뛰어난 예술적 성취로서 행진곡풍의 노동가요만을 기억하는 이들이 꼭 들어보아야 할 수작이다.

바이오 디스코
1989년 홍익대 미술대학 조소과 입학 1992년 진보 미술동인 '현실감각' 창립, 현장 중심의 대중적 미술운동 전개 1993년 '문화예술생산자연합' 창립 1996년 록밴드 'may-day' 음반 가사 작업 - <전선은 있다> 등 1997년 '일러스트 조각'전 출품 록 밴드 '천지인'의 콘서트 공연 중 게스트 무대
<눈물꽃>이라는 노래를 듣고 머리에 꽃을 한번 달아보았다며 자유스러움을 보여준 연영석 씨는 <이씨 네가 시키는 대로 내가 다 할 줄 아나>와 <간절히>를 들려주었다. '내 일한 만큼만 갖는 세상'을 꿈꾸는 연영석 씨는 직설적인 가사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달했다.
<눈물꽃>이라는 노래를 듣고 머리에 꽃을 한번 달아보았다며 자유스러움을 보여준 연영석 씨는 <이씨 네가 시키는 대로 내가 다 할 줄 아나>와 <간절히>를 들려주었다. '내 일한 만큼만 갖는 세상'을 꿈꾸는 연영석 씨는 직설적인 가사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달했다.
인터뷰

나의 변함없는 문제의식은 혁명입니다
일시 : 2005년 7월 14일
대담 : 연영석 VS 서정민갑
인터뷰 전체보기
서정민갑 : 어렸을때는 어떤 음악을 들으셨나요?
연영석 : 미술학원에서 그림 그릴 때 음악을 틀어놓고 있어서 많이 들었죠. 전 댄스음악을 무진장 들었어요. 고등학교 때 나이트 클럽 많이 갔을 땐 일주일에 8번씩 갔으니까요. 물론, 댄스음악만 들은 건 아니고, 당시에 라디오에 나왔던 히트곡들도 많이 들었죠. 어렸을 때 합창반이기도 했어요. 오락시간에는 팝송 가사를 한글로 적은 다음에 다 외워서 불러가지고 인기를 끌기도 했죠(웃음)
서정민갑 : 본인 스스로 ‘끼가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연영석 : 없진 않은 것 같아요(웃음) 미대 들어오기 전에 미대에 계속 떨어지니까 연극해보고 싶었어요. 연극 단체도 가보고 개그맨 시험까지 봤어요(웃음)
서정민갑 : 1992년에 문화예술생산자연합을 만드셨는데 소련이 무너졌을때죠?
연영석 : 그렇죠, 우리가 막 그런 학습 받을려고 할 때 소련이 붕괴되고 나니깐 선배들이 딴소리 하더라구요. 그래서 우리는 “엿먹어라, 우리가 소련보고 운동하냐? 우리 사회 때문에 운동하는거지” 하고선 계속했죠. 선배들이 그랬어요. 다른 사람들이 다 정리하는데 너희들은 이제 막 시작한다고.
서정민갑 : 당시 어떤 고민을 하셨나요?
연영석 : 우리가 실패를 할지라도 우리의 경험은 우리에게 축적된다고 생각했어요. 우리는 그때 조직의 강령까지 만들었는데 ‘실험정신’이라는 말을 유난히 강조했죠. 우리가 보기에는 기존의 노동 문화가 너무 보수적인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실험정신을 기본적으로 한다는 걸 고집스럽게 아이덴티티처럼 밀고 나간거죠
서정민갑 : 노래운동 진영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연영석 : 음악운동에 대한 독자적인 생각의 틀을 만들기 전에는 구체적이지 않았던 거 같구요. 민중가요가 변혁과 떨어질 수 없지만 뭔가 달라질 필요가 있다, 그리고 다양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죠.
서정민갑 : 대학 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이 있나요?
연영석 : 혁명이죠, 혁명의 방식이나 나의 대응 방식들은 변했지만 꾸준한 문제의식은 혁명이죠.

연영석 : 그때 우리 단체안에 작은하늘이라는 팀이 있었는데 밥먹고 연습만 하는 거예요. 그래서는 안되는데 싶어서 우회적으로 집회 다니면서 솔직하게 써놓은 글들을 작은하늘 연습실 앞 게시판에다 붙여놨어요. 음악은 기능이 전부가 아니다, 기능도 중요하지만 뭘 얘기할건지가 정말 중요하다. 그런 얘길 한건데, 그걸로 노래를 만들더라고요. 그러다, 음반낼 때 가사요청이 와서 쓰게 된거예요. <전선이 있다> 같은 경우는 같이 녹음하다가 갑자기 가사가 나온 경우였죠.
서정민갑 : 조직이 해산하면서 상처받아 <라면>이라는 곡을 쓰고 작곡하기 시작했다면서요?
연영석 : 그전부터 라면을 자주 먹었어요. <라면>은 문화예술생산자연합이 거의 해산되어야 할 상황에서 노래를 흥얼흥얼거리면서 만들어 봤어요. 우리나라 말에 높낮이가 있잖아요. ‘아침에 눈을 뜨면 담배꽁초를 찾아 헤매고...’ 이러면서 처음엔 송창식씨 같은 스타일로 만들었죠. 그땐 기타 칠 줄도 몰라서 메이데이 보컬하던 친구에게 코드, 리듬 배워가면서 곡의 꼴이 만들어진거죠. 내가 만든 <라면>을 사람들에게 들려주면 사람들은 “이게 뭐야” 그랬죠(웃음) 그 다음에 <미친놈> 인가를 기타치면서 만들었어요. 단체가 해산해서 고민이 많고 힘들때라 기타 가지고 놀 시간이 많았어요. 나를 위로해 줄 수 있는 게 기타밖에 없다보니 곡을 쓰게 된 거죠. <나는 부품>도 내가 운동판 들어와서 부품같은 느낌이 들어서 쓴 곡이예요
서정민갑 : 그 때 쓰신 곡이 10곡 정도였는데 음반을 낼 생각을 하셨네요
연영석 : 모르니까 그런거죠. 그리고, 그전부터 농담처럼 사람들한테 “나도 음반내야지” 얘기하고 많이 다녔는데 사람들은 물론 내가 농담을 잘하니까 빈말일거라고 했죠. 그러다, 진짜 해보고 싶기도 했고, 음악을 하면 운동을 떠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싶더라구요.

연영석 : 생각나는건 그때그때 적어놔요. 예전에는 메모지로 적어놓고 요즘에는 컴퓨터로 적어놓죠. 예전엔 작업하다가 생각이 막혀서 컴퓨터 끄고 자려고 불 끄면 안 나던 생각이 다시 나고, 또 생각이 막혀서 자러가면 다시 생각이 나서 잠을 잘 못 자는 일도 있었어요(웃음).
서정민갑 : 가사는 컴퓨터에 넣어두면 되는데 곡은 어떻게 하셨어요?
연영석 : 예전에는 삐삐에 녹음했어요. 지나가다 공중전화 박스에 가서 제 삐삐에 전화를 하고 혼자 공중전화 박스에서 중얼중얼 노래를 불러서 저장했죠. 저장해 놓은지가 오래되서 날린 것도 꽤 많아요. 그리곤 그걸 다시 들으면서 계속 불러서 외우죠. 핸드폰이 나오고부턴 다른사람 전화로 내 핸드폰에 전화를 해서 녹음하기도 했죠. 최근엔 친구가 개인용 녹음기를 사줘서 거기에 녹음하구요
서정민갑 : 가사와 곡을 쓸 때 특별히 염두하는 건 어떤건가요?
연영석 : 말 맛하고 설득력이죠
서정민갑 : 연영석씨 곡들중에 낭만적인 곡은 전혀 없습니다
연영석 : 없는게 아니라니까요(웃음). 안 써지는거죠. 가끔은 편안하게 불러볼 수 있는 노래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하지만 그냥 안 써지는거예요. 사실 순수한 느낌의 음악을 듣는 걸 좋아해서 여자 가수들 것도 많이 듣고 어떻게든 억지로라도 하려면 할 수도 있겠지만 난 뭐든지 내키지 않는걸 하는건 싫어해요

연영석 : 제가 메이데이 공연할 때 찬조 출연해서 몇곡 부른적이 있었거든요. 그걸 봤던 천지인 매니저가 천지인 공연하는날 게스트였던 윤도현씨가 홍수로 길이 막혀서인지 갑자기 못 온다고 하니까 대타로 저랑 유병열씨를 세운거예요. 그래서, <라면>하고 <엄마 미안해>를 불렀던거 같은데 반응이 나쁘지 않았어요. <라면>이라는 노래를 한다니까 사람들이 처음엔 웃으면서 재미있게 듣다가 나중에는 진지해지는게 재미있었죠.
서정민갑 : 언제쯤 실제로 음반을 내야겠다고 생각하셨나요?
연영석 : 구체적으로 음반 내야겠다고 생각한건 단체 해산 이후예요. 단체 해산하고 처음에 생각했던 건 죽음이었어요. 너무 절망감이 크고 사람들에 대한 실망감도 컸거든요.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 잘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운동을 시작한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니까 사람들이 미워지더라구요. 그건 결국 내 욕심이었다는 거거든요. 다 내 책임인거예요. 나중에는 내가 못나서 막 미워지고 그러다보니 죽고 싶은거죠. 그런데 그 순간 역설적으로 나를 보게 되더라구요. 그래서 앞으로 뭘할까 생각하다 그즈음 노래도 쓰고 했으니까 현장 활동하는 가수를 해볼까 생각하며 음반도 준비하게 됐죠.
서정민갑 : 첫 음반낼 때 문화노동자모임, 맘대로레이블 이라는 이름을 붙이셨는데 개인이면서 조직이름을 쓴 방식이 흥미로웠습니다
연영석 : 그전에 조직생활을 하면서 조직이 사람을 끌고나간다는 부담감 같은게 있었어요. 결국 개개인이 잘 구현되고 하나로 어우러져 나가는 것이 조직인건데 어찌되었든 조직적인 끈을 놓고 싶지는 않았죠. 그때부터 네트워킹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어요. 지금은 문화노동자라는 말이 보편화 되어있죠? 그래서, 문화노동자모임에 가입하겠다는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굳이 키울 생각이 없어요. 레이블 이름을 계속 넣는 건 아직도 Lazy Blood 라는 이름으로 밴드를 하고싶은 미련이 남아 있다는 것이기도 해요.
서정민갑 : 연영석씨의 1집은 그전까지의 민중가요와는 다르게 개인적인 목소리가 크게 부각되어 있었습니다
연영석 :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만든건 아니구요. 당시가 내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는 조건과 상황이었어요. 아무리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더라도 나를 통해서 드러나고 실천될텐데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존경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거죠. 그걸 하지 않고서는 견딜수가 없었어요. 1집에서는 당신의 나 자신에게 가장 충실해서 애정이 많아요.

연영석 : 잘 안되더라구요. 몇 번 시도는 했는데 남들에게 들려주면 사람들이 “이게 무슨 투쟁가야?” 이랬죠(웃음). <돼지 다이어트> 같은 곡은 독점 재벌이야기를 내 방식으로 풍자한거구요.
서정민갑 : 1집의 <나는 부품>같은 곡에서는 이펙트가 다양했는데 고명원씨의 의도였나요?
연영석 : 아뇨, 제가 그런 사운드를 좀 좋아하는 편이예요. 1집에서 의도했던 표현에 그나마 근접한 곡이 <나는 부품>이예요.
서정민갑 : 1집 만들기 전부터 록음악을 본격적으로 듣기 시작하셨나요?
연영석 : 메이데이 일 도와주면서 많이 듣게 됐죠. 우리 단체에 밴드가 있으니까 음악에 좀 관심을 갖게 된거고 록음악을 좀 들려줘라고 부탁했더니 고명원씨가 테입을 복사해주는데 거기에 블랙사바스, 메탈리카, 디버플의 노래가 담겨있었죠(웃음). 그래서 “이게 디버플이구나, 나도 아는 노랜데, 이게 블랙사바스꺼구나, 나도 들어봤는데” 이러면서 들었죠. 전 가수 이름이나 곡 이름은 잘 안 외워요. 그게 뭔지는 몰라도 귀는 있는거잖아요. 그걸 꼭 논리적으로 알아야만 하는건 아니예요. 몰라도 할 수 있어요. 예술이 무슨 자격증을 주는거 아니잖아요? 누구나 가능성이 있는거죠.
서정민갑 : 민중가요와 록사운드의 결합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연영석 : 처음엔 멜로디 라인과 사운드가 맞아주질 않았죠(웃음) 그래서, 원곡 자체의 특성을 아무리 편곡으로 포장을 해도 한계가 있는거예요. 지금은 많이 발전했어요. 제가 보기엔 가장 중요한 건 곡이라고 생각해요. 거기에 제대로 된 편곡이 들어오고 사운드가 제대로 결합되는게 중요하겠죠.
서정민갑 : 1집 냈을 때 주변의 반응이 어땠나요?
연영석 : 의아해하시는 분들도 계시고, 신선하게 보시는 분들도 계시고, 통쾌해 하시는 분들도 계셨고 비판적인 분들도 계셨고,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도 계셨죠. 현장 노동자 문화패들은 제 노래를 듣고 “저게 민중가요야? 저게 노동가요야?” 하면서 의아해했어요. 그런 의구심은 활동으로 많이 쇄신시킬수는 있었어요. 저는 대중이 생각하는 편견을 깼다고 생각해요. 음악의 편견을 깨는건 쉬운게 아니에요. 1집 낼 때 저는 막대기를 확 휘고 싶었던 욕구도 있었던 거에요. 조직의 논리가 너무 컸지만 개인도 있어야 운동이라고 생각했고, 맨날 했던 얘기 똑같이 하는게 운동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서정민갑 : 고명원씨와는 어떻게 작업하게 되셨나요?
연영석 : 고명원씨가 작은하늘할 때 알게 되었죠. 제가 고명원씨의 감수성을 좋아했어요. 민중음악진영에서 그만큼의 경험과 역사성, 음악적 감수성을 가진 연주자는 근래에 나오기 힘들거라는 생각을 했고 저는 고명원씨와 맞는다고 생각했죠. 사람들은 잘 몰랐겠지만 처음에 음악을 시작할 때 계획이 다 있었고 나름대로 자신감도 있었어요. 다만 솔로로 하는게 좋을지 고명원씨랑 같이 하는게 더 좋을지 갈등이 됐어요. 고명원씨를 챙기고 싶은 생각도 있어서 나름대로 큰 결심을 하고 밴드를 하자고 했는데 이야기가 잘 안되서 그냥 같이 음반을 내게 된거죠
서정민갑 : 고명원씨와 계속 같이 작업을 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연영석 : 2집 할때도 고명원씨와 밴드하고 싶은 욕심을 못 버렸어요. 그런데 고명원씨가 프로듀싱을 하고 싶어하는 것 같고 그렇게 해서 잘되면 좋겠다 싶어 2집의 프로듀싱을 맡긴거죠. 3집할때는 이러저러한 사정도 있었구요.
서정민갑 : 98년부터 서울역 거리공연하셨죠?
연영석 : 어려움도 많았지만 재미있었어요. 지금 집회문화는 규격화되어있어서 재미가 없는데 서울역 공연은 내가 노래 부르던 말건 관심없는 사람들은 지나가고 들을 사람은 듣고하는게 좋았죠. 서울역에서 어떤 노래부르면 노숙자분들이 좋아서 춤추고 춤추다 막 싸우고(웃음). 지나가는 분들이 음료수 사다주기도 하고 했던 그 때 기억이 제일 많이 남아요. 제가 여유가 있으면 음향 들고 그런 곳들을 좀 다녔으면 좋겠어요.
서정민갑 : 보컬이 특히 개성적인데 스스로 어떻게 평가하고 연습하시나요?
연영석 : 특별히 연습하지는 않구요. 매력이라고 생각한적도 없어요. 어쩔땐 쪽팔려요(웃음) 그리고 솔직히 저는 섬세한 목소리가 좋아요. 그런데 잘 안돼죠. 그래도, 3집은 약간 다르지 않나요? 나름대로 노력한건데(웃음) 옛날에 노래 안할 때 주다스 프리스트 음반을 처음 듣고 단체 사무실에서 새벽에 4시간씩 막 노래 부르고 그런적은 있어요. 가수하겠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노래가 너무 좋아서 고음 올라가는거 해보고싶고 그래서 정말 열심히 부른 적은 있죠.
서정민갑 : 2집은 가사가 적확해지고 사운드도 공격적입니다. 신자유주의 시대를 살아가야하는 자의 분노가 생생하게 살아있습니다
연영석 : 그렇게까지는 고민 안했구요(웃음). 고명원씨는 내 작업에 접근할 때 밴드식으로 접근하지 않아요. 그래서 밴드 스타일로 해달라고 요구했어요. 2집 컨셉이 ‘공장’이었쟎아요? 나는 이 사회가 공장이다, 생산관계를 은폐시키고 생산수단을 서포팅 해주는 공장 안에서 사람들은 뺑뺑이 돌고 산다,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게 도망치고 싶어하면서 산다. 우리 노동자들이 이런 공장을 넘어서는 연대 활동을 하지 않으면 사회는 변화되지 않는다는 얘기를 하고싶었던거예요.
서정민갑 : 2집 준비를 어떻게 하셨나요?
연영석 : 2집을 준비하는 시간이 길어서 정리를 좀 많이 할 수 있었어요. 저는 일부러 공부를 하지는 않았지만 보고있으면 안목이 생겨요. 저는 음악을 3~4시간씩 멍하게 듣고 앉아있기도 해요. 연구하면서 들으면 재미없잖아요
서정민갑 : 2집은 연영석씨의 스타일을 더 강하게 밀고 나갔습니다
연영석 : 모든 음반은 목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이 음반이 뭘 이야기하려 하는지 모르는 음반은 실패한 음반이라고 생각해요. 2집 작업할 때 늘 염두에 둔 것은 젊어지려고 한 것이었어요. 요사이 운동하는 젊은 친구들이 더 늙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내 음악이 자극제가 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대학 다닐 때 랩으로 “최루탄과 지랄탄이 날리고 날려도 노동해방 노동해방” 이러고 놀았거든요. 내가 만약 가능한 70세까지 노래를 부른다면 나를 밟고 올라갈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종종 현장에 있는분들에게 “내 음악이 좀 그렇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아는 현장동지들은 “네가 김호철 선배류의 노래를 만들면 연영석이냐? 그러니까 연영석인 거지” 하죠.
서정민갑 : 2집 <노란선 너머 세상>에서 환호성을 쓴 이유가 궁금합니다
연영석 : 한번 해보고 싶었어요. 그 때 레드 핫 칠리 페퍼스 뮤직비디오를 보고 있었는데 레드 핫 칠리 페퍼스가 양말로 거기만 가리고 나와서 연주하거든요. 여성 관중들이 난리가 나죠(웃음). 그 환호성을 가져다 쓴거예요. 뒷부분에 “기타리스트 고명원” 이러쟎아요. 뒤에도 더 많았어요. “고명원!” 그리고 “감사합니다”해요. 그런데, 계속 환호성 소리가 나는 거예요. “끝났어요... 감사합니다.... 끝냈다니까요(웃음)” 그런거 다 지웠죠 “이제 집에 가요...됐다니까요” 이런 것까지 있었는데 너무 장난스러워서.
서정민갑 : 게으름의 욕망이 2집에서는 보다 부각되어 있습니다
연영석 : 열심히 살아야한다는 건 이데올로기예요. 자본이 만들어 놓은 시계일 텐데 우리는 그 틀에 맞춰 다람쥐 쳇바퀴처럼 먹고 살아야하쟎아요? 우리는 실업에 대한 공포속에서 부품처럼 조달되어 가는 거구요. 왜냐하냐면 실업자군이 형성되어야만 “여기 싼 노동자가 얼마든지 있어. 일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해야 돼” 하는 것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주입시킨단 말이죠. 그래서 전 느림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편이예요.
서정민갑 : 2집에 만족하시나요?
연영석 : 솔직히 만족 못했죠. 고명원씨에게 프로듀싱을 맡겼고, 곡에 대한 아쉬움은 있죠. 그런데 작업에 대한 아쉬움은 많지 않아요. 음악은 고명원씨가 고민을 많이 했어요. 3집 작업 하면서 ‘내가 1,2집 작업할 때 참 편하게 작업을 했구나, 고명원씨가 참 고생 했겠구나’ 싶었죠.
서정민갑 : 특별하게 3집 준비하면서 하신 일이 있나요?
연영석 : 2집 끝나고 나서 허훈씨가 컴퓨터 프로그램을 깔아줬어요. 녹음할 수 있게 프로그램을 깔아줘서 60곡 정도 작업을 했어요. 그걸 다 날리기는 했지만 통기타에다 일렉 디스토션 걸어가면서 제가 연주 다하고 녹음해보니까 마음이 훨씬 놓였죠.
서정민갑 : 3집은 2집보다 짜임새는 더 탄탄해졌지만 힘이 떨어진 듯 합니다
연영석 : 3집에서는 감성을 가지고 싶은 욕심이 있었어요. 잘 안 됐지만 2집의 컨셉이 공장, 분노 이런 것이었다면 3집은 절망이거든요. 절망은 희망의 시작이예요. 절망을 해 본 사람이 희망을 알죠. 3집 작업할 때쯤 무진장 힘들었어요. 삶도 그랬고, 사람도 많이 죽었고, 그래서 음반 제목도 <숨>이라고 붙였죠. 저로서는 1집처럼 하려고 작업한 거죠.
서정민갑 : 노동현장을 끊임없이 다니시는데 실제 음악활동에 도움이 되시나요?
연영석 : 도움이 되니까 하는 거죠. 안 그랬으면 이렇게 못했어요. 미술할 때도 그랬지만 세계 어느 나라에서 미술하는 사람중에 이런 얘길 가지고 만화조각이란걸 가지고 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게 나의 가치인 거예요. 그래서, 당당한 거예요. 내가 운동하기 때문에, 내가 현장을 다니기 때문에. 안 그러면 제 음악은 널린 음악이예요. 기타톤이나 이펙트, 건반 소리 이런 것에서 예를 들면 라디오 헤드 같은걸 어떻게 따라가겠어요? 장비의 문제도 있고, 조건의 문제도 있지만 내가 내 음악에 당당할 수 있는 건 바로 그런 요소들 때문이예요.
서정민갑 : 현재 노동운동의 문화 마인드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많습니다
연영석 : 노동자들이 문화 마인드를 갖지 않고는 세상이 변하는 게 아니예요. 노동자 공연을 다니다 보면 지역 편차, 학력 편차, 나이 편차 모두 있어요. 내가 미술하다가 노래했다하면 지식인들은 경외해요. 하지만 동네 아줌마 아저씨들이나 청소용역하는 아저씨들은 신기해하죠. 그 차이는 아주 커요. 정말 못 배우고 힘없는 사람들이 문화에 대해서 뭔가 알게 되지 않는 이상 세상은 그들만의 리그에요. 나는 어쨌든 노동 운동 고민하면서 노동 운동판에 들어왔어요. 그러면 나는 노동자들과 함께 변화시켜 나갈 거예요. 어떻게 변화시킬건지 늘 고민해서 가끔은 싸우기도 하지만요.
서정민갑 : 기존 스타일의 민중가요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연영석 : 그 곡들의 효과는 평생 있을 거예요. 임노관계가 계속 유지되는 한, 자본주의가 소멸되지 않는 한 <단결투쟁가>는 언제나 불려질거고 언제나 효율성이 있어요. 그건 누가 죽인다고 죽일 수 없는 노래예요. 하지만 그런 노래가 우리들의 삶과 투쟁을 다 얘기할 순 없겠죠.
서정민갑 : 현재 함께 활동하는 노동가요 진영의 음악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연영석 : 음악적으로 많이 아쉽죠. 무엇보다 어떤 질감이나 완성도 같은 것이 잘 축적되질 않아요. 고민이 잘 안되고 부족해서 관성화된다는 느낌이 많이 들구요. 가끔은 자족하는 게 아닌가 생각도 해보지요. 음악하는 사람의 개인적인 능력차이도 분명히 있지만 민중음악판에 구조적인 문제가 있어요. 끊임없이 축척하고 재생산시킬만큼 틀이 안되어 있어요.
서정민갑 : 많은 창작자와 새로운 작품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진보진영에서조차 불리워지는 노래는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연영석 : 음악을 향유하는 방식이 변화한 것도 있다고 생각해요. 음악 창작자들이 과거에 비해 대중을 더 고려하지 않는다는 문제만이 아니라 대중들도 변화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대중은 이미 변화하고 있는데, 과거의 노래처럼 박수치고 따라 부르기 쉬운 노래만이 발전이고 좋은 거라고 평가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반대로 따라 부를 수는 없지만 음악적으로 뛰어난 음악들이 좋은 거라고만 생각하지도 않거든요. 저는 그만큼 사회적 변화가 있다고 생각해요. 또 하나는 정서적으로 많이 건조해졌다고 할까? 예전부터 지금까지 공감을 주었던 노래들은 당대의 에너지가 축약된 표현력들이 있거든요. 사회적으로 혼란스럽고 충돌이 많이 일어날 때 좋은 작품들이 많이 나오는데 지금 사회가 좀 재미없잖아요. 팍팍 튀는 분위기도 아니구요. 그럼에도, 민중가요 진영의 음악적 욕구들은 많이 다양해진거라고 생각해요.
서정민갑 : 최근 민중가요 진영의 창작자들은 예전보다 예술적 완성도에 보다 많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연영석 : 음악하는 사람이 음악성 신경 쓰는게 왜 부정적이겠어요? 다만, 그것만으로 한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음악에 대한 고민들을 한다고 하지만 반대로 과거에 가졌던 중요한 덕목들은 많이 약화되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저는 지금 민중가요가 잘 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서정민갑 : 현재 민중가요 진영의 가장 큰 문제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연영석 : 인력충원이 안 되는 거죠. 인디에 대한 평가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어쨌든 여자애들도 기타메고 홍대 앞을 왔다갔다 하잖아요. 그런데 우리한테는 그런 모습이 없어요. 대학노래패들중에 어떤 팀이 밴드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런게 많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현장 문화패들도 사람이 좀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게 아쉽죠. 그리고 누구든 좋은 공연을 좀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걸 보고 감동받고 나도 한번 해보고 싶다, 저런 삶을 살고 싶다, 나도 무대에서 저렇게 당당하게 해보고 싶다는 욕구들을 만들어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게 진짜 교육일 수 있겠죠.
서정민갑 : 민중가요가 놓치지 말아야 할 덕목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연영석 : 자기 욕구를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게 기본적인 덕목이라고 생각해요. 그게 없으면 그냥 밥벌이 해 먹고 살기 위한 하나의 도구밖에 안되겠죠. 그리고, 또 하나는 사적인 얘기를 할지라도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열려진 역할을 스스로 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민중가요 하는 사람들이 또 단결투쟁가를 만들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다양한 질감들과 다양한 정서들을 끄집어 내는 창작들이 나오려면 자기가 함께 호흡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함께 아파할 수 있는 감수성이 중요한 덕목이겠죠
서정민갑 : 연영석씨를 움직이는 에너지는 어떤것인가요?
연영석 : 음악이 좋은거겠죠. 그리고, 함께 하는 사람들이 주는 힘같은 거예요. 이주노동자 강제 출국 반대 집회가면 대한민국에서 내 노래를 알고 듣는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된다고 내 팬들을 자꾸 추방시키냐고(웃음) 우스개소리하면 사람들이 더 웃어요. 그런 사람들은 어쨌든 힘이 되줄 거라고 생각해요.
서정민갑 : 앞으로 어떤 노래를 부르고 싶으신가요?
연영석 : 어떤 노래라는 구체적인 것은 없어요. 그때 그때 내가 해야 할 노래를 하고 싶어요
서정민갑 : 삶의 목표가 있다면 어떤 것인가요?
연영석 : 개인 콘서트가 아니라 정말 투쟁하는 대중들 앞에서 밴드 편성으로 제대로 된 음향에 맞춰 공연하면서 신나게 한 번 같이 놀아보는 상상을 해요. 야외에서 입장료 없이 그냥 모금함 놓고 돈 있는 사람은 더 내고 돈 없는 사람은 안내면서 신나게 노는 거죠. 그리고, 앞으로 뭘 더 노래할지 모르겠지만 사랑 얘기도 한 번 써 보고 싶어요(웃음). 내가 안 해봤던 걸 한번 해보고 싶네요. 예를 들면 통기타에 하나에 건반 가지고 음반을 내고 싶은 생각도 있구요. 컴퓨터 음악도 해보고 싶어요(웃음). 그런데, 그건 뭘 해야 하는 거죠?(웃음)
문화노동자 연영석 - <눈물꽃>이라는 노래를 듣고 머리에 꽃을 한번 달아보았다며 자유스러움을 보여준 연영석 씨는 <이씨 네가 시키는 대로 내가 다 할 줄 아나>와 <간절히>를 들려주었다. '내 일한 만큼만 갖는 세상'을 꿈꾸는 연영석 씨는 직설적인 가사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달했다.
광명 음악밸리 소개 페이지에서 http://www.mvalley.org/ (사진,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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