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아침에 나는 항상 그렇지만 먼지 나는 햇살을 뒤로하여 줄기차게 주장해 본다. 아이들의 천진난만함이 부르는 즐거운 놀이를 배워볼 필요가 있다고...2층 침대가 버티고 있는 안방에 첫째 세희가 천으로 그네를 엮어 놓았다. 그곳을 차례대로 둘째 셋째가 자유로이 들어가 놀이를 한다. 녀석들 참...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이들은 2층 침대를 놀이터로 삼아 즐겁게 놀이하면서 하루를 보내곤 한다. 그리고 언제 끊어질지도 모르는 저 그네를 손수 묶어 튼튼하게 하고 안전점검을 해내는 첫째의 역할이 무척중요하게 여겨지곤 한다.?

최근 지구온난화에 관련된 다큐멘터리 하나를 본다. 영국 BBC에서 만든 것으로 사실을 외국하고 있다는 의혹도 있다. 지구온난화의 주범이 CO2가 아니며 전 세계가 필요 이상으로 염려하고 있다는 내용이 주된 것이다. 아무래도 개발론자들의 논리가 베어 있는 다큐다. 영국 BBC가 나타내려는 개발론자들의 논리를 엿볼 수 있었다.?


아침에 엿보인 하늘아래 곳곳에 솟아있는 십자가 그 고난의 십자가를 제대로 생각해 보지 않고서 지속되고 있는 대한민국에 펼쳐져 있는 복음의 힘이 얼마나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낙담이 되곤 한다. 그래도 역사는 흘러가고 있다. 파국의 상황을 맞이한다하더라도 현재의 편함을 즐길 뿐이라고 여겨지는 이유다. 하여간 최소한 각종 사회복지시설이라는 명목의 이름으로 우매한 사람들의 돈줄을 빨아먹는 짓은 하지 않기만을 바랄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여기저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서 있는 아파트들...

평생 저 닭장 속에 들어가 살지 못할 것 같다. 저 닭장속에서 사는 유익함을 모르는 것도 아니거니와 사회적 지위와 돈에 대한 욕심이 없어서라기 보다는 돈을 주무르고 자유자재로 요리할 수 있는 총명함이 부족한 탓이라 해야 한다. 조금만 속이고 조금만 발빠르면 블로소득 벌 수 있는 방법이 무궁무진한 대한민국 사회에서 그런 짓들이 웬지 체질에 맞지 않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저녁이 가까이 다가온다.?

자전거를 타고 한강변을 달린다. 쌓여있던 스트레스는 일단 포장한 채 패달을 구른다. 저 멀리 남산타워가 보이고 동호대교의 자태가 저녁을 설레게 한다.?

한동안 잠잠했던 토론 참여를 하고 싶은 발광증이 일어난다. 최근의 남북관계에 대한 불편함들이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벌어진 토론이다. 그동안 이해하지 못했던 강경론자들의 주장에 대해 조금은 관대한 마음을 가질 수도 있게 되었다. 머리에 든게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 누려왔던 기득권이 주는 편안한 옷을 벗어던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겪어보지 못한 나로써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그와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SBS에 시시비비 토론프로그램이 있는데 SBS시사토론으로 개명을 하면서 제1기 시민토론단을 모집했다. 그때 지원했는데 운이 좋았는지 이번에도 선택되었다. (혹여 지원한 모든 사람들이 시민토론단으로 뽑힌 것은 아닌지 모르겠지만...^^;;) 총 32명이 선택되었는데 이를 A,B팀으로 나누어서 격주간으로 토론단이 참여하는 구조이며 두 팀간의 중간 다리역할을 위해 임원진 및 운영진을 두었다. 시민토론단의 역할은 기존의 백분토론과는 약간 다른 시스템으로 운영된다. 백토의 시민논객이 패널들의 흐름을 끊지 않기 위하여 패널들의 의견을 사전분석하고 질문을 시의적절하게 던지는 구조라면 시사토론은 찬반의견으로 나뉘어 시민들의 짧은 의견을 먼저 듣는 구조로 첫회 녹화 방송을 마쳤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SBS시사토론은 8시 30분부터 녹화에 들어가 거의 10시 30분이나 11시 정도에 끝난다. 프로그램 종료 후 운영진 모임 한 후 시계를 바라보니 벌써 새벽 1시가 가까와 온다. 잔차를 타고 집으로 향한다. 한남대교를 지나 운동장 하나를 쳐다본다. 그 새벽에 공을 차는 그룹들이 있어 한참을 멈춰 서 있는다. 이런 그룹이 한강변을 지나가면서 4개 그룹을 본다. 대단한 사람들 많다. 새벽 찬공기를 가르며 숨소리도 거칠게 저 새벽을 운동으로 보내는 이양반들은 도대체 어떤 그룹이란 말인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새벽 3시에 다가오는 공기는 살결을 파고든다. 더 이상 달리다가는 아침 햇살이 비춰올 것이다. 추위로 수축되어 있는 몸을 풀기 위해 찜질방에 들렀다. 쌓였던 피로를 샤워로 씻어내고 이곳에 모여있는 많은 수면자들과 자리를 함께 한다. 깊은 잠에 빠져들지 않았지만 아침 10시가 되어서야 가까스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그리고 다시 잔차를 움직여 집으로 향한다. 구리 자전거 전용도로를 지나 양정역 방향으로 가는 길에 비닐 하우스로 특용작물 하는 곳이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홍릉천변을 따라 아침을 달린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남양주시청을 지나 올라가는 이 길은 너무도 길다. 그냥 끌바하기에는 길고 패달을 굴러 넘어가기위해서는 인내력을 요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침햇살을 받으며 달려온 마지막 장소 안데르센 어린이집에서 아이들과 서성이고 있는 아내를 발견한다. 드디어 도착했다. 어제밤부터 시작한 긴 하루의 여행이 끝난 느낌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매주 시작되는 고민하는 짧은 여행이 주는 다양함들이 베어있는 하루다. 1박 2일을 열심히 달린 후 한주를 마무리 하면서 다양한 삶의 모습을 바라보게 된다. 이번주 내내 머리속에 맴돌았던 남북관계 특수성을 고려치 않은 불편한 버티기 작전과 의도적 관계 훼손으로 인한 현대아산과 남북경협 피해자들에 대한 책임은 어디에 돌려야 할? 말로는 열어놓았다던 대화창구는 대외망신살이 담긴 한번의 발언으로 날려버리는 현 정부의 수장은 분명 기독교 장로라서 가져야 할 덕목을 겸비한 사람이라기보다는 돈맛을 알고 도덕불감증을 겸비한 훌륭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은 확실한 듯 하다.
2008/11/28 16:14 2008/11/28 16:14
글 걸기 주소 : http://jis.pe.kr/road/?/trackback/423

덧글을 달아 주세요

[로그인][오픈아이디란?]

옆에 있던 한 아주머니는 자기는 27일째 촛불집회에 나오고 있다고 하면서 말문을 연다.

"주위에 교회다니시는 분들이 나를 교회에 데려가려고 무지 노력했다. 그런데 쉽게 결정하지 못하고 안가고 있다. 그런데 오늘 여기 나와보니 내가 자발적으로 천주교, 성당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_-; "

지난 촛불집회 시청앞 광장에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진행했던 집회에서 들었던 이야기다. 교회는 무엇이 문제였을까? 기독교의 사회를 향한 대응이 그리고 사람을 향한 사랑의 메시지는 늘상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한 것일까?

온 나라가 기독교인들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국시를 기독교로 되는 것을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사랑과 정의와 평화가 강조되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비리의 중심에 기독교의 외형만 존재한다면 기독교는 죽은 종교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열심히 무엇이 문제일까 고민해 보지만 답은 먼곳에 있다. 상식을 벗어나 현 시대를 읽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많기 때문이다.
2008/07/21 09:43 2008/07/21 09:43
글 걸기 주소 : http://jis.pe.kr/road/?/trackback/355

덧글을 달아 주세요

[로그인][오픈아이디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식당에서 기독교란 무엇인가? 기독교의 한국내에서의 역사성 및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을 여러번 받았다. 그전에는 그것이 무엇이라고 확언했었는데 이제는 그것이 잘 안된다. 아마두 수많은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시각들이 현재의 대안없는 변론의 상황을 만든 것이라 여겨졌다. IVP를 통해 접했던 예전의 수많은 책들이 지금은 아무 쓸모없을 정도로 먼지만 쌓여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어서 다시 책을 집어 들었다. 그 당시에는 지성을 겸비한다는 명목아래 지식을 쌓기 위한 도구였다고 회고하는 바 이제는 왜 그런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점을 들고 책을 읽어 나간다.

과연 실제로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위하여 '세상을 헛된 것으로 여기며', 십자가로만 '자랑하고, 그것을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는가? ' 기독교 신앙이 과연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에 대한 믿음'이라는 말로 정확하게 요약될 수 있는가? 그는 자신에게 이렇게 묻는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이렇게 집중하는 것은 무슨 근거에서인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Page 28 본문중에서...)

니이체는 행복이란 '권력이 증가한다는 느낌'으로 규정한다. 그와 관계없이 그리스도인들은 결성(Integrity)을 위하여 수치스러운 일을 선포해야 하며 부끄러운 것을 자랑으로 여겨야 하는 것에 대한 의문에 대한 대답으로 대신한다. 

이슬람교의 가장 안타까운 특징 중 하나는, 하나님의 중요한 선지자가 그렇게도 수치스러운 종말을 맞이하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선언하면서 십자가를 거부하는 것이다. 코란은 죄를 담당하는 구주의 죽음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Page 56)

복음의 핵심은 구약성경에서 예언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며 그 분을 하나님의 아들이자 나의 죄를 대속하신 구세주로 받아들이는데에 있다. 영국 캠브리지에서의 CICCU 와 SCM의 역사에 대한 짧은 소개글을 읽으면서 91년도 리더훈련시 있었던 6개대(서울대,건국대,이화여대,고려대, 경희대, 광운대) 사태를 되돌아 본다. 당시 IVF의 사회참여에 대한 요구들이 왜 받아들여지지 않았을까? IVF에서 보내온 소리지를 통해 지면으로 돌아보는 그 당시의 상황을 현장에 있지 않았던 사람들은 피부로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그리스도인으로 내 스스로가 생각하는 현재의 시각과 관점들은 그 당시 리더수련회 참석을 거부했던 동 시대의 6개대 학생들과 많이 다르지 않은데 말이다. 난 편안하게도 그 당시 정규 리더 코스인 LTC를 무사히 마쳤고 안전하게(?) 캠퍼스 학생리더로써 섬기게 되었다. 아마도 사회참여에 대해 그렇게 넓은 시각을 열수 있는 기회도 없었을 뿐 아니라 신앙의 눈으로 보는 사회운동에 대한 신학적 기틀도 캠퍼스내에서는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했던 그 시절 그 사건들은 현재의 나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 같아 혼란스럽기까지 했다. 분명한 것은 복음의 핵심과 그 중심에 서 있을때 흔들림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그 당시의 무모하기까지 짝이 없었던 용감함들은 그리 틀렸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지금은 그것조차도 고민하며 살아가는 것이 힘들기까지 한 것을 보면 말이다. 이사야 53장의 말씀으로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을 대신해야 할 것 같다. 그토록 고민하는 이 시대의 역사성과 그리스도인으로써 가져야 할 한줌의 양심이 꿈틀거리는 것은 아마도 당신앞에 고결한 삶을 살겠다고 맹세하는 순간 각인되었던 신앙의 결실이지 않을까 싶다.

특별히 로잔언약중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이란 부분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고 있다. 수없이 읽어보아도 동감이 가는 것은 그만큼 고민의 결과가 비슷하였기 때문인것 같다. 로잔언약 전문 :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 (Christian social responsibility)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창조자이신 동시에 심판자이심을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 사회 어디서나 정의와 화해를 구현하시고 인간을 모든 종류의 압박에서 해방시키려는 하나님의 권념에 참여하여야 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인종, 종교, 피부빛, 문화, 계급, 성 또는 연령의 구별없이 모든 사람이 타고난 존엄성을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사람은 서로 존경받고 섬김을 받아야 하며 누구나 착취당해서는 안된다. 이 점을 우리는 등한시하여 왔고, 또는 왕왕 전도와 사회 참여가 서로 상반되는 것으로 잘못 생각한데 대하여 참회한다. 사람과의 화해가 곧 하나님과의 화해가 아니며, 사회 행동이 곧 전도는 아니며, 정치적 해방이 곧 구원은 아닐지라도, 전도와 사회-정치적 참여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의무의 두가지 부분이라는 것을 우리는 인정한다.
왜냐하면 이 두가지는 다같이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우리의 교리, 우리 이웃을 위한 우리의 사랑,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순종의 필수적 표현들이기 때문이다. 구원의 메시지는 모든 종류의 소외와 압박과 차별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를 내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과 부정이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이것을 공박하는 일을 무서워해서는 안된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면 그의 나라에 다시 태어난다(중생함을 받는다). 따라서 그들은 불의한 세상 속에서도 그 나라의 의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전파하기에 힘써야 한다. 우리가 주장하는 구원은 우리의 개인적 그리고 사회적 책임을 총체적으로 수행하도록 우리를 변화시켜는 것이어야 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행17:26, 31, 창18:35, 사1:17, 시465:7, 창1:26, 27, 약3:9, 레19:18, 눅6:27, 35, 약2:14-26, 요3:3, 5, 마5:20, 6:33, 고후3:18, 약2:20)

이사야 제 53 장
1 우리의 1)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2)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3)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8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9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4)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10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11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12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2007/02/19 13:52 2007/02/19 13:52
글 걸기 주소 : http://jis.pe.kr/road/?/trackback/241

덧글을 달아 주세요

[로그인][오픈아이디란?]

대학이란 낭만의 섬에서 친구들과 함께 뒹굴던 옛날이 잠시 기억난다.

어느새 난 자유인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명패를 달고 다닐만큼 모든 집회와 성경공부와 수련회에 빠짐없이 출석하였다. 그런것이 싫었다면 죽어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덕분에 나에 대한 주위 사람들의 평가는 신실함이었다. 내 친구는 그것에 조금 덜 민감하여 슈퍼 빤질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하여간 그곳에 구속되어 있었던 것은 삶의 진정한 목적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얻었던 삶의 목적은 를 위한 삶을 살지 않고 을 위해 사는 삶을 살자였다. 그것은 그 이후 나의 인생에 많은 방향타를 건드려왔다.

생각지도 않은 공학전공자가 신학생들이 봐야할 기독교서적을 읽어대며 그 세계관을 정립한다며 설쳐댔던 일은 대학 입학하자마자 도서관의 일반 소설류와 문학책을 섭렵한다는 열정보다 깊었으며 강렬하였다. 그런 열정이 결국은 균형있는 삶을 살지 못하게 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 순간만큼은 행복했다. 아마두 그리스도인이라면 한번쯤은 경험하지 않았을까?

삶을 그런 관조적인 자세와 넉넉한 마음같은 타자의 삶을 살기 시작했던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아마두 내 앞에 있지 않으나 늘 마음의 고향이 되고 있는 부모님들의 빈자리 때문이다. 잘 나가던 고3때 아버님은 사고로 인해 돌아가셨으며 그 나이때 병원 영안실에서 어른들이 쥐어 준 지폐 몇장을 천국여비로 쓰라고 싸늘한 주검위에 넣어주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내 마음속의 아버지는 생활고를 극복하느라 그 어려운 노동을 감내하기 위해 늘상 술로 힘든 인생을 달랬던 분이시다. 어린시절부터 고3때까지 그런 아버지는 친구같은 존재라기보다는 사랑하지만 마음을 터놓지 못하고 다만 그분의 심정을 이해하는 정도였다. 반면에 어머니는 무척 자상하시기도 하고 유머가 있어 늘상 삶의 활력소가 되었다. 시골에서 인천 주안에 정착하기까지 그렇게 오랜 삶을 사신 것도 아니었다. 위암말기증세로 몇년을 고생하시다 아버님을 따라 하나님 나라로 가셨기 때문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가족의 의미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피가 물보다 진하다는 말과 함께..
웬지 혈육은 언제 만나도 헤어져 살고 있다는 느낌보다는 함께 살아간다는 것과 어떠한 잘못과 원망이 있더라도 그들의 상황이 어려울때는 측은함이 자연스럽게 마음속에 베이게 한다.
아마도 안타깝다는 것은 그만큼 가족과 같은 따스함이 묻어 있을때만 나타날 수 있는 감정이 아닐까 한다.

자신의 삶과 인생에 아무런 개입이 없다면 굳이 안타까와 할 이유도 걱정이 되어줄 이유도 없을 것이다. 우리의 존재가 그렇듯 어울어짐을 요구하며 함께 하고자 하는 집단공동체를 형성하고자 하는 마음도 다 관심과 사랑을 응집하고자 하는 열망에 기인한다고 본다.

겨울은 삶을 건조하고 춥게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답을 찾고자 하며 끊임없이 노력할 때 어두웠던 내면의 불편함들이 사라지지 않을까? 시화방조제가 만들어 놓은 길목을 따라 갯벌을 걸었던 우리 다섯 식구들은 아직 끈끈함으로 사랑함으로 함께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누가 뭐라해도 누군가를 향하여 내면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면 그것으로 가족애는 살아있는 것이 아닐까? 받은 상처가 아무리 깊고 크더라도 나를 향한 그분의 한결같은 용서앞에는 고개를 숙여야 하기때문이다.
2007/02/03 02:45 2007/02/03 02:45
글 걸기 주소 : http://jis.pe.kr/road/?/trackback/237

덧글을 달아 주세요

[로그인][오픈아이디란?]

북쪽에는 남북분단 이전에 2,600여 교회가 있었으며 평양은 동양의 예루살렘으로 불릴 정도로 당시에 다른 도시보다도 가장 많은 교회가 세워져 있던 곳이다. 교회내에서 흔히 북한을 돕거나 통일을 말할 때 이 사실을 우선적인 근거로 이야기 하게 된다. (참조 URL -
 http://kcm.co.kr/mission/map/Asia/Northkorea/data/nk0008.html)

기독교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남북한의 통일은 샬롬(평화)의 하나님이 당연히 바라시는 것이므로 언젠가는 이루어질 역사적 사실임에는 틀림없다. 북한은 분단 이후 사회주의 체제를 기반으로 세워졌으며 우리나라(남한)는 자유민주주의를 기반으로 세워졌다. 또한 해방 후 남북한 대 통합을 시도하던 사람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같은 민족끼리의 싸움으로 인해 분단이 되었으며 그 이후 50년이 더 지난 지금까지 씻어지지 않는 상처를 우리는 떠 안고 가고 있다. 언젠가는 이 상처가 치유되어야 할 날이 오게 될텐데 그 치유과정은 아마도 분단되어 떨어져 살아온 만큼의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다.

최근 프랑스의 TV 인 M6의 기자가 개인용 카메라로 찍은 동영상이 2007년 1월 21일 방영되었다는 보도를 접했다. 그런데 제목은 아주 기가 막힌다.  프랑스 TV “북한, 일상화된 지옥”
어디서 많이 들어 보았던 우리나라 주류 신문으로 분류되는 조중동의 논조다. 이런 종류의 영상물은 그 대상에 대해 대단한 영향력이 있어 이를 접하는 사람들에게 잘못된 인식과 시각을 심어줄 수 있다. 특별히 폐쇄 사회로 분류되는 북한에 대해서는 더욱 그럴 것이다. 이 기자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북한 사회를 일상화된 지옥으로 분류할 수 있는 기준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아마두 프랑스에서는 꿈도 꾸어 보지 못했을 일상화된 것들이 기준이 되었을 것이다. 가령 내가 아플때 병원에 가면 준비된 간호사가 있고 구비된 의료장비를 갖추고 있는 의사가 있어 진료를 끝내고 수납원에게 돈을 내고 나오는 것이 그런 것이다. 즉, 현재 내가 살고 있는 곳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어떤 곳은 지옥이 될수도 있고 어떤 곳은 천국이 될수도 있는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따라서 제목을 저렇게 잡은 것 자체가 편견으로 시작한다고 선언하는 것과 다를바 없다.

북한을 이해하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그중에 하나는 문화적으로 다른 감각으로 살아가는 동시대의 북녘 사람들의 시와 소설, 뉴스, 공연, 영화등을 접해보는 것이다. 이런 간접적 경험말고 북한 사람들을 직접 만나 대화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금강산 관광은 그런 좋은 기회를 만들 수 있다. 북한의 문화공연이 온정각에 위치해 있는 공연장에서 펼쳐지고 있으며 자연스레 문화적인 교감을 나눌 수 있다. 기회가 되면 개성공단을 방문해 보는 것도 하나의 커다란 인식의 전환을 이루어 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겠다.

통일은 어느순간 우리 곁에 다가올 것이다. 통일을 위해 준비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인생의 동반자로 살아갈 아내와 함께 살겠다고 선언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준비가 필요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집안에 필요한 새로운 가구들부터 시작해서 법적인 혼인신고 장래 출산 계획 및 교육 가정경제를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부터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막상 살아갈때 당황하게 만드는 것들이 너무 많다. 잘 준비되었다는 것은 일이 발생하기 전부터 그 결과를 예측하는 것을 말한다. 발생할 일들을 위해 평소에 내공을 쌓아놓는다면 막상 일이 닥쳤을 때 당황하지 않게 된다. 시작만큼 철저하게 준비된 미래를 향해 오늘도 그 연습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북한이해와 통일교육은 다가올 통일시대를 준비하기 위해서 너무나두 중요한 영역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2007/01/31 22:44 2007/01/31 22:44
보람말 : , , ,
글 걸기 주소 : http://jis.pe.kr/road/?/trackback/236

덧글을 달아 주세요

[로그인][오픈아이디란?]









2006/10/12 00:16 2006/10/12 00:16
보람말 : , , ,
글 걸기 주소 : http://jis.pe.kr/road/?/trackback/179

덧글을 달아 주세요

[로그인][오픈아이디란?]

모임과 나

어떤때는 자신의 이야기가 잘못 전달되어 여러가지 불필요한 오해를 일으키기도 한다. 내 생각은 이런데 너의 생각은 어떤 것인지하며 갑론을박하는 것이 모임일 수 있다. 모임의 성격은 다양하다. 교육을 위한 모임, 논의를 위한 모임, 서로 알아가고자 하는 모임, 새로운 지식을 얻고자 하는 모임...

그럼 내가 가지고 있는 모임들의 성격은 무엇일까?

모여있다면 그만큼 힘을 받을만한 일들을 향해 가는 것이 궁극적으로 필요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요즘엔 모여서 교육받는 것이 싫어진다. 모여서 나눔을 하는 것이 좋아지는 이유다. 이제 나이가 들어간다는 생각을 하게 된 이유다. 나이가 자라가면 자신의 명확한 주장이 생겨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것을 보면...

창밖은 어스름 저녁공기가 뒤덮는다.
지나가는 소음소리는
너희들이 떠들기 좋지 않은 환경을 만들겠다고 한다.
그래도 그 소음은 모임을 방해하진 않는다.
오히려 귀를 쫑긋 세우고 퇴보한 믿음에 불을 지핀다.

따스해진 가슴과 시선을 가지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가슴은 자꾸 답답해지고 입술은 열려지려한다.
여러번 닫았으나 봉해져 있는 입가에는 잔주름이 늘어간다.

종국에 마지막 의식을 통해 들려오는 저녁종소리는 내일을 기약하지는 않는다.

세뇌 [洗腦: brainwashing - to force someone to change their beliefs or ideas, etc by applying continual and prolonged mental pressure]

[원래 가지고 있던 생각을 다른 생각으로 바꾸거나, 어떤 사상과 이론을 반복, 주입시켜 목적한 대로 생각을 가지도록 유도하는 행위. 즉, 어떤 사람이 자기는 용감하다고 계속 생각하여 원래의 불안함을 떨친다면 이것이 자신을 쇄뇌시키는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이 민중에게 공산주의적인 사상을 불어넣어 공산당으로 가입시킨다든가, 다단계업자가 사람들에게 계속 다단계의 이론을 집어넣어 회원으로 끌어들인다면 이것은 타의에 의한 세뇌이다.

반대되는 말은

자각 [自覺, self-consciousness]
  

[일정한 상황에 놓인 자기의 능력·가치·의무·사명 등을 스스로 깨닫는 것] 따라서 자각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경험이나 행위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필요하다. 이러한 의미로 볼 때 먼저 자신의 무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한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에 의해서, 자각의 개념은 비로소 철학적으로 깊어졌다고 할 수 있다. 철학은 가장 자각적인 학문이라고 하는데, 특히 실존철학(實存哲學)은 자각의 문제를 인간의 유한성(有限性)에 놓고, 둘도 없는 단독자(單獨者)의 지평(地平)에서 파내려간다.

신앙과 철학을 세뇌와 자각으로 비유한다면 어떨까?
2006/10/11 01:17 2006/10/11 01:17
글 걸기 주소 : http://jis.pe.kr/road/?/trackback/178

덧글을 달아 주세요

[로그인][오픈아이디란?]

삶의목적

우리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너를 지으며 너를 모태에서 조성하고 너를 도와줄 여호와가 말하노라(사 44:2)
"하나님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으신다" (알버트 아인슈타인)

신앙의 정의

지난주 화요일 몇몇 남성들의 모임이 있었다. 그동안 교회의 이곳저곳 하는 일이 많아서 쉬기를 원하는 친구는 이 모임에서 일단 사라지기로 하였고, 나머지 네 사람중에 한명은 수학교육과 편입으로 학기가 시작이 되어서 공부를 해야할때가 되어 모임에서 당분간 배려를 원했다. 그날은 우리 모임의 방향성이 상실되어 표류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는지 일단 모임을 해서 의견을 듣고자 하는 자리였다.

핵심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 말씀을 많이 나누고
- 모임이 예수그리스도 중심적이었으면 좋겠다.
- 회사생활이 바빠서 말씀을 등에 짊어지고 살아갈 수 없는 황무지 같은 삶에서 조용히 삶을 사는것에 대한 만족감이 있었다.
- 신앙이 휩쓸려 다니는 것이 아니었음한다.
- 책을 통해 나눔이 있었으면 좋겠다.
- 누구때문에 무엇을 했으면 안될것 같고 마음가짐에 열심이 있었으면 한다.
- 한 Chapter 를 한단위로
- 오후 예배시간에 설교로 다시 목사님이 가르치고 있으니...

나에게 있어 그동안의 신앙은 누군가에 의해 주입되어 왔으며 그것으로 인해 어려움을 당할때 늘상 나 자신과 하나님과의 문제가 아니라 나와 주변과의 관계문제가 더 크게 보이는 것을 경험해 왔다. 다양한 신앙서적과 넘쳐나는 복음성가 및 찬송가에서는 오직 그리스도를 최우선에 놓는다. 그것이 틀리다는 것을 부정한 적은 없다. 그런데 늘상 복음의 진정한 의미를 자신의 영적인 상태가 좋아지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예수그리스도는 교회가 잘되는 것보다 교회에 모인 사람들이 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더 관심이 있다. 그런데 내가 본 교회의 신자들은 교회에서 위로받고 교제하고 은혜와 충만을 얻으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돋자리 깔고 밤세워 기도하고 성경책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읽다보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믿는다. 그런데 최근에 난 그것이 얼마나 단편일률적인 교회 설교교육의 효과인지 다시한번 돼 새겨볼 수 있었다. 사실 여러가지가 불편해진 지금, 교회가 가지는 영적인 권위와 목회자가 가지는 영적인 권위를 생각해 본다. 좀더 배운 사람이 좀더 배우지 못한 사람과 큰 차이는 없어 보인다. 다만 선택받은자와 그렇지 못한자로 교회는 이분화 되어 있을 뿐이다.

선택의 기로에서 난 이제 신앙을 멀리서 보고 싶다.
이미 나를 앞서 살아갔던 현자들은 삶의 궁극적 목적을 말해주거나 삶의 허무함을 노래하였다.

난 단 한마디만 하고 싶다. "타인에 의한 타인을 위한 신앙이 아니라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신앙이 되기를 바란다"고...
2006/09/19 01:22 2006/09/19 01:22
글 걸기 주소 : http://jis.pe.kr/road/?/trackback/176

덧글을 달아 주세요

[로그인][오픈아이디란?]

교회와 나

최근에 갖게 된 새로운 생각들을 일단 정리하고 가야 할 것 같다. 난 우리 교회의 권찰이고 친구는 전도사이다. 곧 목사가 될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난 교회의 모든 일정들에 대해서 사역자라는 직분속에 모두 위임을 했다고 생각하며 교회는 내가 관심 써야 할 곳이 아니라는 생각에 그냥 친구에게 전적으로 위임을 했다고 스스로 굳어진 생각을 하게 되었고 교회라는 테두리보다는 좀더 세상속에서의 나 즉, 평소에 내가 관심을 가졌던 사회적 책임과 그 역할에만 집중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오랜 시간동안 대학에서 같이 동역의 길을 걸어왔기에 그리고 그 이후에 교회에서 같은 마음을 품고 있으며 서로를 잘 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최근 여러번의 대화를 통해 서서히 알게 되었다. 내가 생각하는 것과 친구가 생각하는 교회의 모습은 확연히 달랐다.

1. 의사결정 과정


교회(敎會)는 말 그대로 사람들이 함께 모여 서로 배우기 위해 존재한다고 본다. 특별히 예수그리스도의 사역의 영역(당시예수그리스도가 약한자, 소외된자를 찾아가셨다는 점, 열두 제자들을 그 당시 사회적으로 높은 신분의 고리 타분한 인간들에게서 찾지않았던 것, 사역의 중심이 영혼구원에 있지만 스스로 대속 제물이 되어 타인을 위해 희생했다는 점 등)에서...그런데 이 시대에 진정한 교회는 무엇인가? 우리 교회는 왜 그렇게도 다인 중심적이 아닌 일인 아니 몇명의 사역자라는 누명(?)을 씌어 그 몇사람 중심적인 사역(事役)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운영이 되어가고 있을까? (오해를 풀기 위해서 본인에 대해 말하자면 사실 교회에 15년 이상을 다녔고 교회가 사회를 향해 영혼 구원을 위해 애쓰며 그속에서 참된 은혜와 기쁨을 누렸던 것을 전혀 부정하지 않는다.)

개입(Engagement)하고 싶지 않았던 때가 더 많았다. 왜냐하면 개입한다는 것은 반드시 갈등을 가져오고 갈등이 만들어내는 것은 의견 대립과 시끄러움이다. 그런데 왜 자꾸 말이 시작되기만 하면 교회에 대한 이야기 특히 앞으로의 일들을 생각하며 이야기하게 될까? 그것도 아주 직설적으로 말이다. 아마도 내가 친구이기때문에 여러가지 직설적인 말을 해도 그나마 서로간에 이해를 할 수 있었을 것이라 예측하지만 인간적인 입장에서 생각해 볼때는 기분이 나쁜 것이리라.

의사결정 과정은 여러가지 통로를 통해 만들 수 있다. 현재의 의사결정 과정은 주일 오후예배이후 남아있는 사람들이 함께 기도한 후 마음이 하나가 될때 이루어진다고 했다. 참석자들은 3명의 교회 섬김이 및 청년들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직분을 가지고 있는 집사,권찰 등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왜 교회의 의사 결정 과정에 스스로 참여하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일까? 첫째는 이 교회가 내 교회다라는 의식이 부족하다. 즉, 내가 주인이 아니기에 (더 정확히 말하자면 주께서 나를 이 교회로 부르셨다.) 아무리 애정을 가지려고 해도 관심의 영역에서 밀리게 된다. 둘째로 애들 키우느라 바쁘다. 주일날 오후 늦게까지 시간을 낼 수 있는 그룹은 한정되어 있다. 셋째는 소외감이다. 결국 교회 전체를 바라보고 코디네이트 해주고 있는 담임 교역자와의 의사소통 부재가 가져오는 단절감이 크다하겠다. 어쩌면 의사 결정이라는 것이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있다. 인간이 계획하고 인간이 결정하는 것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져 있는 분위기에서는 말이다. 그러나 결국 자신의 의견이 반영되어 일을 계획하고 일을 수행해 나갈때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역에 동참할 수 있는 자발적인 마음이생기는 것이 아닐까?

2. 예배시간

난대학교때 IVF라는 단체에서 활동했다. 그때 좋았던 것은 감성이 강한 내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스스로 받아들였다는 것과 지성으로 그것에 동의했으며 진정한 서로간의 교제속에 사랑을 발견했다는 것에 있다. 예배시간은 바로 그런 것들을 통합해 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예배시간의 대부분은 늘상 설교에 집중된다. 나머지 시간에서 위의 요소들을 끄집어 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순서들이다. 그러다 보니 결국 설교를 통해 더 많은 것을 주어야만 하는 시간이 늘어나게 된다. 그래서 12시 30분으로 고정되어 있어야 할 예배시간은 1시 가까이 늘어지게 되는 경우가 많아진다. 보통 한국 교회들은 예배시간을 1시간안에 다 소화한다.(현대 사회가 진척되어 갈수록 1시간을 넘기면 다들 힘들어 하므로...) 결국 시간에 있어서 효율적인 예배지기들(한백교회는 팀즉 3~4명이 예배시간을 준비한다. 담당자들이 미리 계획할 수 있도록 2개월 단위로 공지한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다. 설교가 길어져 그 내용이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약속된 시간내에서 전달해 주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너무 많은 포인트를 주려다 보면 시간이 길어짐은 당연한 결과다.

3. 고착화 된 관념

보통 교회의 구조를 보면 책상배치가 항상 권위적이다. 실제 권위는 그런 형식적인 것에서 나오지 않는다. 가령 설교 강대상은 한단계 높이 있다. 그리고 나머지 책상,의자들은 강단을 중심으로 일자로 차곡차곡 줄을 지어 서 있는게 보통의 모습이다. 그러다 보니 다수가 설교자 일인에게 집중하는 결과가 도출된다. 설교라는 강의 형식에는 맞을 수 있으나 진정한 코이노니아 즉, 공동체성을 만들어 내기에는 어려운 경직된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그러다 보니 강대상은 누구나 올라갈 수 있으며 예수님을 통하여 이제는 제사장의 특권이 부여되었던 구약시대의 하나님께로 나가기 위한 대리자로써의 단일 업종이 사라졌음에도 강대상은 몇몇에 의해 점령당하고 있다. 일반 사람들이 거기 올라가서 설교나 사회를 보는 것은 거의 이상하리만큼 어색하게 느껴지고 두려움이 넘치도록 만들고 있다. 설교자만 특권이 부여된 것으로 이해하게 되는 이유다. 개선이 필요한 점들이 있지만 그동안의 교회 관습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그걸 벗어난다는 것이 어렵다. 교회 전통을 벗어날 경우에는 항상 이단 시비가 일어났었기에...

1부 끝.

(이곳에 적고자 하는 교회에 대한 개념은 모두 사견이며 절대적인 기준도 아니다. 따라서 청중에 따라서 다른 견해가 있을 수 있음을 미리 밝혀둔다.)
2006/03/13 06:35 2006/03/13 06:35
글 걸기 주소 : http://jis.pe.kr/road/?/trackback/123

덧글을 달아 주세요

[로그인][오픈아이디란?]